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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공간
설재원··수정됨 2026.07.21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공간
부산수학문화관 신규전시체험물 공간 조성
지나치는 벽을, 멈추는 공간으로
이번 프로젝트는 '고대 문명과 숫자 체계'라는 체험 콘텐츠를 배치할 공간을 디자인하는 일이었습니다.
고대 문명이 어떤 숫자를 사용해왔고, 오늘날 상용화된 아라비아 숫자가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를 다루는 전시 체험물이에요.
저희에게 주어진 독립된 전시실이 아닌, 지나가는 통로에 있는 벽 한 면이었습니다. 모름지기 복도란 멈추라고 만들어진 공간이 아닌, 지나가라고 만들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의 과제의 중점은 단순히 '콘텐츠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가 아닌, '한정된 공간에서 사람을 어떻게 멈춰 세울까?' 였어요.

이목을 끄는 방법 : 흰 복도에서 붉은 벽으로
가장 먼저 고려한 것은 벽의 색이었습니다. 깊은 와인 빛 붉은색. 이러한 컬러를 선정한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요.
첫 번째는 시대를 옮겨 놓기 위해서 였습니다. 숫자가 처음 새겨지던 시대의 흙, 점토판, 오래된 유적 속 벽의 표면 ㅡ 그 따뜻하고 오래된 느낌을 살려주는 색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글이나 체험물에 눈길이 닿기 전에, 공간의 색만으로 '다른 시간이 흐르는 공간'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두 번째는 다른 복도 공간과의 분리였습니다. 흰색 벽과 밝은 창으로 가득한 복도에서 붉은 벽으로 넘어오는 순간, 공간의 경계가 사용자의 걸음의 속도를 늦춰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죠. 컬러의 대비를 통해 '이 공간은 특별한 공간이다.', '이 공간은 무엇인가 다르다.' 라는 인상을 주고 싶었습니다.

머무르게 하는 방법 : 공간과의 대화
몰입을 이끌어내는 공간과의 대화
붉은 벽이 분위기를 잡았다면, 그 다음은 이 공간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알려줄 차례였어요. 저희는 패널이나 간판을 세우는 대신, 글씨를 직접 벽에 얹기로 했습니다.
'고대 문명과 숫자 체계' 라는 큰 글씨가 사용자의 주의를 집중 시키고, 그 아래 줄에 질문을 던져 사용자가 자연스럽게 공간에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했어요.
'인류가 수를 기록하고 계산하기 위해 만들어낸 숫자의 시작을 함께 살펴볼까요?
지루하고 긴 설명문이 아니라, 사용자에게 참여를 권유하는 '대화'를 시작하는 질문을 올려두어 사용자가 능동적이고 자연스럽게 전시에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쥐어주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동이라는 단순한 행동에서 끝이 나는 복도라는 공간에서의 시간이, 사용자에게 '특별한 경험'으로 남게 될 수 있습니다.
또, 강요가 아닌 자발적 참여를 유발해 사용자가 전시 체험을 좀 더 능동적인 자세로 몰입하여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사용자의 발을 묶는 것에 성공했으니, 다음은 사용자가 체험에 몰입할 수 있도록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이 공간의 주인공은 결국 디스플레이, 키오스크 였으니까요.
이 키오스크가 단지 '기계'가 아닌, 대화의 연장선이자 메인으로 보이려면 공간의 벽과 또 다른 대비를 이루어야 했어요. 그래서 흰색 프레임으로 마감을 하였고, 단순히 세워두는 것이
아닌 마치 박물관의 전시품처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또, 강조의 효과는 색조합 에서도 나타납니다. 화면 속 콘텐츠는 갈색·금색의 따뜻한 톤인데, 이걸 흰 틀이 한 번 정리해 주면서 붉은 벽과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안에서 은은하게
빛나 보입니다. 벽 색과 화면 색 사이에서, 흰색이 그들 사이의 완충 역할을 수행해 전시 컨텐츠와 벽 모두 공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했습니다.

마치며,
돌아보면 이 프로젝트는 공간을 단순히 멋진 전시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어요.
한정된 공간에서, 누구나 그저 지나치던 복도의 벽 한 면을, 잠깐이라도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자리로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평범한 공간을 특별한 경험을 담은 공간으로 바꾸는 것.
의미 없이 스쳐 지나가던 데드 스페이스를 밀도 높은 '전시 공간'으로 재정의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공간은 사용자에게 멈추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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