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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그래픽] 없으니까, 만들었다 — 대구형무소역사관 고서 재현기
김수현··수정됨 2026.07.21
![[전시그래픽] 없으니까, 만들었다 — 대구형무소역사관 고서 재현기](https://tech.giworks.co.kr/uploads/posts/2026/03/4c8f1f9e-20de-411b-9b5c-b8a9c74c1a0c.png)
일반적인 박물관이라면 실제 유물이나 고서를 전시 공간에 직접 들여놓는다. 하지만 대구형무소역사관은 조금 달랐다.
역사적 기록들 중 상당수가 실물 없이 사진으로만 남아 있었고, 원본 유물을 확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그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었다. 형무소라는 공간의 무게감, 그 안에 켜켜이 쌓인 시간을 관람객이 온몸으로 느낄 수 있으려면
— 눈앞에 '그 시절의 종이'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고서를 만들기로 했다. 바삭하게 바래고, 세월의 흔적이 배어든 그 느낌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그것이 출발점이었다.
전시를 만들다 보면, 관람객이 무심코 지나치는 그 한 장의 종이에도 수많은 고민과 시행착오가 담겨 있다.
대구형무소역사관 전시를 준비하면서 우리 팀이 가장 공을 들인 부분 중 하나는 바로 고서(古書) 느낌의 유물 재현이었다.
역사적 공간의 무게감을 살리기 위해서는, 전시 안에 놓이는 문서 하나, 종이 한 장도 그 시대의 공기를 담고 있어야 했다.
|바삭하게 바래고, 세월의 흔적이 배어든 그 느낌 — 그것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가 출발점이었다.
첫 번째 시도 — 커피를 쏟아보다
가장 먼저 떠올린 방법은 의외로 단순했다. 커피를 종이에 쏟아 누렇게 착색하는 것.
실제로 오래된 문서들이 산화되면 커피색과 비슷한 황갈색을 띠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직접 커피를 적시고, 말리고, 번짐의 정도를 조절해보며 여러 차례 테스트를 반복했다.
결과는? 어느 정도 분위기는 났다. 하지만 번짐이 고르지 않거나, 건조 후 종이가 울거나, 무엇보다 전시물로서의 내구성과 균일한 품질을 보장하기가 어려웠다.
단순한 아이디어가 현장에서는 생각보다 훨씬 까다로운 변수를 만들어낸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 Adobe Photoshop을 활용해 여러 색상으로 인쇄 및 커피를 쏟아 색상을 조절한 시도
두 번째 시도 — 충무로 인쇄소를 찾아서
다음 발걸음은 충무로였다. 인쇄와 종이의 거리, 충무로에는 다양한 용지를 직접 만져보고 비교할 수 있는 인쇄소들이 밀집해 있다.
팀원이 직접 발품을 팔아 여러 인쇄소를 돌며 누런 빛이 도는 고지(古紙) 계열의 종이, 크라프트지, 한지 계열 등 다양한 소재를 수집하고 샘플을 비교했다.
종이의 색감, 질감, 두께, 인쇄 적합성까지 하나하나 검토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보기에는 그럴듯해도 인쇄를 올렸을 때 잉크가 번지거나,
실제 전시 공간의 조명 아래에서 원하는 색감이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결과물이 아주 나쁘진 않았다. 단면으로 놓인 한 장의 종이는 어느 정도 분위기를 냈다. 하지만 문제는 도서처럼 옆면이 보이는 경우였다.
책의 측면, 즉 여러 장이 겹쳐 쌓인 단면이 드러나는 순간 프린팅된 티가 고스란히 났다. 색감이 입혀진 건 어디까지나 종이의 표면뿐이었고,
단면은 여전히 새 종이 그대로였다. 고서처럼 보이려면 종이 한 장 한 장, 그 단면까지도 세월의 흔적이 배어 있어야 했다. 그것이 세 번째 시도로 이어진 이유였다.

▲ 충무로 인쇄소에서 다양한 종이를 활용해 출력 ( 포토샵으로 색감조정, 명도조절 포함)
마지막 시도 — 전문 제작팀의 손길
종이 소재와 인쇄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모형제작팀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모형 작업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에어브러시 기법과 조색(調色) 작업을 활용해, 종이 위에 세월의 얼룩과 바랜 색감을 직접 입히는 방식이었다.
조색 단계에서는 황토색, 갈색, 베이지 등의 안료를 섞어 시대감에 맞는 색을 만들어내고, 에어브러시로 농담(濃淡)을 조절하며 종이 표면뿐 아니라
책의 단면까지 고르게 뿌려냈다. 두 번째 시도에서 발목을 잡았던 바로 그 부분 — 옆면이 드러났을 때 새 종이처럼 보이던 문제가 비로소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단순히 색을 입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종이를 의도적으로 구기고 눌러 오랜 시간 손을 탄 듯한 질감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책의 옆면에는 붓으로 흘러내리듯 바랜 한자를 표현해, 실제 원본 고서처럼 제목이나 기록이 적혀 있었을 법한 디테일까지 더했다.
가장자리로 갈수록 어둡게, 가운데는 자연스럽게 바랜 듯한 그라데이션까지 얹히자 비로소 '누군가의 손을 오래 탄 오래된 문서' 같은 분위기가 완성됐다.
수많은 테스트와 조율 끝에 만들어진 이 결과물은, 이전의 어떤 방법보다도 자연스럽고 완성도 있는 고서의 느낌을 담아냈다.

▲ (왼) 제본 전 인쇄 원본 / (오) 고서처럼 표현하기 위해 가공한 모습
그리고 전시실 안으로
이렇게 만들어진 유물 재현 소품들은 자연스럽게 전시실 안으로 스며들었다. 관람객이 특별히 주목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전시의 배경 속 한 요소로.
하지만 바로 그게 목적이었다. 억지스럽지 않게, 설명 없이도 그 시대 안에 녹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관람객이 공간에 들어섰을 때 자연스럽게 '그 시절'의 공기를 느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커피를 쏟고, 인쇄소 골목을 누비고, 에어브러시 앞에 앉았던
그 모든 과정이 결국 '아무도 모르게 완성되는 디테일' 을 위한 것이었다. 전시는 언제나 그렇게 만들어진다.

▲ 대구형무소 역사관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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